한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분들은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대륙에서 유래된 대륙법은 성문법주의(成文法主義)를 그리고 영국을 기원으로 해서 영연방국가들과 미국에서 형성된 영미법은 판례법주의 (判例法主義)를 따른다고 중고등학교의 사회과목에서 배운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단순한 이원적 구분법이 절대적으로 맞다고는 할 수 없는 이유는 영국과 미국은 물론이고 영연방국가인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도 여러가지 법률과 규정인 성문법을 제정해서 운영하고 있기에 영미법을 계수(繼受)한 국가들에는 판례법과 성문법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우리들이 이민 와서 살고 있는 캐나다의 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근원이 되는 영국법과 영국법의 유래를 아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국법 (혹은 영국법과 미국법을 아울러서 영미법)은 일반적으로 ‘Common Law’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앞서 설명한 유럽의 대륙에서 발전된 대륙법인 ‘Civil Law’와 구분이 되어집니다.
영국법을 ‘Common Law’로 부르게 된 이야기를 하려면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학창시절 세계사 수업시간때 배웠던 정복왕 윌리엄 (William the Conqueror)입니다. 윌리엄 1세는 프랑스 노르망디 (Normandy)의 공작이었던 로베르 1세 (Robert I)와 그의 내연녀였던 평민 출신의 에를르바 (Herleva)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나서 사생아왕 (William the Bastard)이라는 매우 악의적인 별명도 갖고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 노르망디의 공작이 된 윌리엄은 1054년과 1056년, 두 차례에 걸친 프랑스왕 앙리1세(Henri I)의 노르망디 침공을 막아냈습니다. 이 후 힘을 더 키우게 된 윌리엄공은 1066년 후계자 결정으로 인해서 혼란을 겪고 있던 잉글랜드(England) 왕위계승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잉글랜드는 왕이었던 에드워드(Edward)가 1066년 1월 5일에 사망하자 급작스럽게 해럴드 2세 (Harold II)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매우 불안한 정국이 이어지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잉글랜드 국내에서는 지금의 덴마크와 스웨덴 등의 북유럽에서 이주해 온 데인인들(Danes)과 잉글랜드인들 (English)과의 내분이 극해 달하고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노르웨이의 침공이 있어서 잉글랜드는 말 그대로 풍전등화의 상황이었습니다.
잉글랜드의 해럴드 2세는 천신만고끝에 노르웨이의 왕인 하랄 3세(Harald III)의 침공을 격퇴할 수 있었지만 군사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은 상황이었고 이런 기회를 간파한 노르망디공 윌리엄은 1066년 10월에 잉글랜드를 침공하였습니다. 결국 영국사에서 큰 획을 가르는 가장 유명한 전투 중의 하나인 (그리고, 밴쿠버의 교민들에게도 매우 익숙한 이름인 Hastings Street의 유래가 된) 헤이스팅스 (Hastings)전투에서 해럴드 2세가 전사하고 노르만군이 승리를 함으로써 승자인 프랑스의 윌리엄공은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를 하게됩니다.
즉, 윌리엄1세는 당시 프랑스의 국왕이었던 필리프 1세 (Philippe I)로부터 작위를 받은 프랑스의 공작과 잉글랜드의 국왕이라는 두 개의 지위를 겸직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영국의 지배계급은 앵글로색슨계 (Anglo-Saxons)에서 프랑스 노르망디 반도 출신의 노르만계로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이를 후세의 사학자들은 ‘노르만 정복’이라고 불립니다.
노르만인들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 이들의 모국어인 프랑스어는 잉글랜드 지배층의 언어가 되었고 피지배계층은 영어만을 사용하는 계층간의 언어분리가 시작되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노르만정복’ 이후 영어를 전혀 읽거나 말할 수 없고 오직 프랑스어만 구사할 수 있었던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르고 공신들 대부분을 차지했던 귀족들 역시도 프랑스어만을 사용하던 노르만디 출신들이었기에 이들이 운영을 하던 법정에서는 프랑스어로 재판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법정에서 사용하는 법률용어들이 대부분 프랑스어로 바뀌게 되었으며 프랑스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하면 재판에서 크나큰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상황은 ‘노르만 정복’ 후 700여 년 가까이가 흐른 1731년이 되어서야 잉글랜드 법정에서 프랑스어를 금지하고 영어를 사용하라고 결정을 한 후에야 다시 정상화될 수 있었습니다.
윌리엄1세는 잉글랜드 지역을 점령한 후 각 지역의 영주들이 지배하면서 인정해왔던 관습법들을 통일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였고 이 후 약 200여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잉글랜드의 법체계는 노르만디인들의 침략이 있기 전 여러 지역에 따라서 제 각각 관습법으로 유지되었던 여러가지 법들이 잉글랜드 전역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도록 ‘Common Law’ 로 바뀌게 됩니다. 즉, ‘Common Law’라는 용어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약 150년이 지나서 1204년에 잉글랜드가 프랑스 노르망디 반도의 영토를 완전히 상실하기 전까지 잉글랜드 왕실과 프랑스는 영토적으로뿐만 아니라 언어와 문화적으로도 긴밀한 관계가 지속되었습니다. 이 후 1337년부터 1453년까지의 영국과 프랑스가 백년전쟁을 겪으면서 14세기에서 15세기를 거치면서 영어는 다시 잉글랜드에서 공용어의 위치를 되찾게 됩니다.
위에 설명을 드린바와 같이 유럽대륙에서 시작된 ‘Civil Law’의 상대적인 개념으로써 영국과 미국 그리고 영연방국가들에서 발전된 판례법을 설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정의 (定義)된 ‘Common Law’와는 별개로 ‘Equity’의 상대적 개념으로서 ‘Common Law’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국어에서 형평법 (衡平法)으로 번역되고 있는 ‘Equity’ 역시도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과거에 이미 판결이 된 선례나 상위법원의 선례를 벗어날 수 없고 이에 반드시 따라야 된다고 규정되어진 판례법인 ‘Common Law’는 본연의 경직성으로 인해서 실행이나 구제방법 (remedy)에 있어서 여러가지 문제점을 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른 정의 (正義)롭지 못한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서 잉글랜드와 웨일즈에서는 14세기에 Court of Chancery라는 형평법을 심판하는 법원을 운영하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즉, ‘Common Law’를 통해서는 자신의 억울함을 해결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국왕이나 국왕을 대리하는 Chancellor에게 이를 정의롭게 해결해 달라고 청원을 하였고 이에 대한 절차를 만들기 위해서 새로운 법률원칙이 제정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Common Law’와 ‘Equity’가 충돌하는 상황에서는 ‘Equity’를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했으며 19세기 후반까지도 영국과 캐나다에서 별도의 Court of Chancery를 운영하다가 이후 ‘Common Law’를 다루는 법원과 ‘Equity’를 다루는 Court of Chancery가 통합되기에 이릅니다.
따라서, 이 경우 ‘Common Law’라는 용어는 ‘Equity’의 상대적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면 영미법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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